추억 여행

폭설 여행: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

하늘은 푸르러 2025. 3. 13. 14:45

신혼 초, 겨울에 석곡에 있는 처갓집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혼자 선암사로 갔습니다. 선암사 절 앞의 아치형의 선승교와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계산에 선암상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 안내도에 따라 선암사->송광사로 향했습니다.

 

순천 선암사 승선교 : 출처- 위키백과

산 중턱에 오자 갑자기 눈바람이 쳤습니다. 하얗게 눈이 내린 산길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길 같았습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이어지는 산속 오솔길,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눈은 모든 소리와 흔적을 덮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폭설로 나뭇가지마다 눈이 소복이 쌓였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함을 깨뜨립니다.

산속을 걷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세상의 소음은 사라지고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숨을 들이켜니, 맑은 공기는 내 안의 탁한 생각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듯했습니다. 온 세상을 덮은 순백의 눈처럼, 마음도 깨끗하고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산길은 눈에 덮여 흔적 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의 막막함은 불안이 아니라 묘한 평화로 다가왔습니다. 길을 잃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마음을 채웠습니다.

나무들은 하얀 옷을 입고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폭설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삶의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가르쳐 주는 듯했습니다. 그 나무들처럼, 나 또한 폭설과 같은 고난 속에서 흔들리더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눈밭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사각거림은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고요를 더 깊게 만들어 주는 듯했습니다. 내 발자국 하나하나가 하얀 눈밭에 찍히고, 그것이 곧 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생각들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상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눈 덮인 산속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어두워져가고, 길은 눈이 덮여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문득 '길을 잃고 산속에서 헤매다가, 밤이 되면 정말 큰일인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점점 공포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눈 덮인 산, 눈 속의 나... '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는지 모릅니다. 생존의 문제! 일단 앞으로 앞으로 나가자며 눈 속에서 헤매다가, 저 멀리 폭설 속에서 송광사의 기와지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선암사->송광사로 겨울 산행, 특히 눈이 올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송광사의 본찰로 들어가는 입구인 삼청교와 우화각: 출처- 순천시 공식 블로그

 

눈 속에 잠긴 송광사는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곳에 서니 폭설 속 산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맞이 했을 지도 모른다는 안도감과 고마움에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잃어버렸던 나 자신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바쁘게 흘러가던 일상에서 잠시 멈춰,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산속에서 찾은 이 고요는 차가운 침묵이 아니라, 따뜻한 위안과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눈 덮인 길과 흔들림 없는 나무들, 그리고 가만히 스며든 고요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찾았습니다. 폭설 속 산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너는 괜찮을 거야 All is well!”

눈이 많이 올 때면 그날 조계산의 산행을 떠올립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던 폭설 속 산길은 그곳에서 느꼈던 적막감, 평화로움, 두려움, 경외감과 함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혹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산속의 고요를 찾아보세요. 그곳에서 잃어버렸던 당신 자신과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 폭설인데 '선암사->송광사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밤늦도록 오지 않아, 아내와 장인, 장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로 무사히 송광사로 도착했다고 알렸고, 장인어른이 저를 픽업하러 오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장인어른 고맙습니다!